멋진 하루

2008. 9. 26. 08:34good


화려한 볼거리와 강한! 스토리로 시선을 끌고 집중하게 만드는 영화가 있고, 잔잔하고 소소한 이야기들로 공감을 이끌면서 흐믓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전자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배트맨-다크나이트라면 후자의 대표적인 케이스는 어제 보았던 멋진 하루였다.

소위 "예술영화"라는 장르를 썩 좋아하지 않는 지극히 단순한 인간인지라, 잔잔하고 조용한 영화면 자주 졸기 마련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고 흩뿌리는 비를 맞으며 퇴근해서, 알뜰하게 쿠폰을 사용해서 저녁을 맛나게 먹고 월급날 기념으로 집에 가져갈 빵을 사고 여유있게 영화를 기다리다 본 그런 멋진 하루에 본 영화라 더 눈에 잘 들어왔나?

영화속에서 두 사람은 하룻동안 참 많은 동네들을 이동한다. 마치 현대자동차 홍보영화라도 된듯이 차로 이동하는 장면을 참 많이 보여주는데 지나가는 거리, 골목중에 아는 곳이 많아서 마치 내가 하루동안 서울시내 전역을 돌아다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화려한 거리가 아니라 그냥 우리주위에서 흔히 보는 골목길이었는데 내 눈에 익은 내가 아는 길이라서 더 반가웠다.

사실 영화가 썩 재미있었다기보다는 영화에서 주는 그 분위기에 빠진것같다. 하정우의 능청스러움이나 극단적인 긍정주의는 어떤 면에서 내 성격이랑도 조금은 닮아있는것같고, 전도연의 까칠한 팬더곰 눈화장도 두시간동안 계속 보고 있으니 어느새 정도 들었다라고 할까.

가끔 영화를 보고나서도 제목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멋진하루도 그런 경우인데, 영화를 보고 좋다고 이렇게 글을 적으면서도 영화제목이 생각이 나지 않아서 검색까지 했으니.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영화의 제목이 결국 영화를 참 잘 말해주고 있는것같다.
 

위 사진은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이다. 이 구도말고 정면에서 네사람을 보여주는 구도가 더 맘에 들었는데 그 스틸컷은 없으니 이걸로 대체. 한가한 오후에 햇살이 내려쬐는 의자에 나란히 앉아 광합성하면서 다들 침묵속 생각에 잠겨있는 저 공기에는 내가 늘 좋아하는 시간의 알갱이, 빛의 알갱이가 담겨있는것같아서 기분이 좋다. 햇빛속에서 다들 자기의 과거를 만나고 있고, 현재의 문제를 지켜보며 미래를 걱정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햇빛은 따뜻하니 크게 걱정은 되지 않을테니. 

게시판을 보니 너무 밋밋하고 지루해서 보는내내 졸기만 했다는 평이 있었는데 다행히 내가 본 극장에서는 하정우의 뻔뻔함이 극에 달하는 순간 다 같이 어이없어하면서 웃고 즐기는 좋은 분위기였다. 주위에 저런 사람 한 사람쯤은 다들 있지 않나 싶은 그런 느낌?

이러쿵 저러쿵 티격태격하면서도 하루동안 많은 길을 다니며 잊고 있었던 자기 자신을 만나고 왔으니 정말 멋진 하루였겠지. "멋진하루"를 본 내 하루도 멋진 하루였다. 영화를 보고 집에 가는 길.  차창을 열고 밤10시에 시작하는 조용한 목소리의 라디오를 들으며 차가 없는 한적한 길을 달리는 기분. 나 역시 멋진 하루. 너 역시 멋진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