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와 껍데기

2010. 12. 3. 00:51daily

2004, 강남. 이땐 내 군대생활도 어느덧 만차였지. ㅋㅋ


내 사회생활은 2001년에 시작된다. 학교를 다니던중에 동기형이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프로그래머로 일해볼 생각이 없냐고 해서 용돈도 벌겸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대학교 3학년때부터 4학년 여름까지 1년동안 학교를 다니며 회사를 다니는 이중생활을 하며 내 인생의 첫 월급을 받았다. (이때는 아마 주2파에 대부분 사이버강의로 돌려서 이중생활이 가능했다.) 그후 불타는 청춘을 만끽하고자 6개월정도 회사도, 학교도 쉰 후에 2002년 1월부터 병역특례요원으로 다시 회사를 다니기 시작해서 그 곳에서 2004년 12월까지 일했다.


오늘 강남에 일이 있어서 나간김에 예전에 병특때 다니던 회사 근처에 가봤다. 당시 일주일에 한번씩은 들르던 중국집에 가보고 싶었다. 배달은 안하고 홀 영업만 하는 짜장면, 짬뽕, 탕수육이 참 맛있었던 가게. 점심시간에 조금만 늦게가면 자리가 없어서 먹지 못했던 그곳.

다행히 오늘 가보니 가게는 그대로 있었고, 분위기도 여전했고, 맛은 음~ 잘 모르겠다 맛은 기억이 나질 않네.ㅎㅎㅎ 아무튼 회사 근방에 있는 내 기억속의 많은 가게들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있어서 참 반가웠다.


그리고 생각났다. 내가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딛고 다른 사람과 같이 직장생활을 하던 그때. 철없고 멋모르게 자기 잘난 맛에 살던 내가 이리저리 치이며 내 부족함을 깨닫고 조금씩 변했던 그 시기. 그리고 그때부터 배웠던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리를 보는 법과, 대화하는 법들. 지금도 여전히 버벅거리고 잘 못하지만 그 공부의 시작은 아마 직장생활의 시작과 같은 시기였던것같다.

유독 나를 싫어해서 나를 괴롭혔던 나보다 늦게 입사했지만 내 선배였던 대리. 개인적으로는 참 친한 형이라 자주 반항하고 또 말도 어지간히 안 들었지만 그만큼 정도 많이 들었던 우리 개발팀장. 365일 낮과 밤이 바뀐채 살고 밥은 안 먹고 커피와 콜라와 라면만 먹으면서 나와는 작업파트너라서 나를 숱한 야근으로 몰아넣었던 개발팀이사. 입에는 늘 담배냄새가 풀풀 나고 홀애비냄새가 나고 맨날 어디서 접대한 여자얘기만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밉상은 아니었던 마케팅이사. 구수한 사투리에 웃는 얼굴로 자꾸 일을 맡기면서 나 아니면 누가 해주겠냐고 접대성멘트까지 잘 하던 마케팅팀 팀장. 왕년에는 회식자리에서는 술을 퍼부어서 마셨다고 하는데 지금은 피부관리때문에 술은 잘 안마신다는 당시에는 희귀한 짙은 아이라인을 하고 다니던, 강한 인상의 소유자이면서도 참 착하던 경리누나. 책상서랍에 소주를 넣어두고 야근할때마다 홀짝홀짝 마시면서 내가 막힌 부분을 잘 해결해주던 내 옆자리 개발동료. 그리고 참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과 같이 일하면서 배운 가장 소중한 것은 프로그래밍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조직이 굴러나는 원리를 알게 된것이었다. 저 회사가 정말 훌륭하게 돌아가는 이상적인 회사라서가 아니라 이런저런 많은 문제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조직이 어떻게 변하고 또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언젠가는 떠날 병특이라는 방관자적 입장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조직이 원활하게 움직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게 대화라는 당연한 사실도 이때 이런저런 사건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그렇게 시작된 사회생활이 이제는 대충 9년째에 접어든다. 내 나름대로는 내 자리를 그럭저럭 잡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될수 있으면 모든 사람과 내 알맹이를 보여주며 진심으로 대하려고 노력하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내게 알맹이가 아니라 껍데기만을 보여준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고 그것을 또 나름대로 인정하려고 노렸했다. 알맹이로 대하는 것과 껍데기로 대하는것 둘중 어떤 한가지가 좋고 나쁘다고 말할수는 없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두가지 모두 필요하니까.

그치만 요 며칠사이에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정말 눈뜨고 봐줄수가 없다. 각자가 서로 자기 알맹이는 전혀 내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알맹이를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지으며, 자기들의 껍데기만을 계속 들이대는 풍경. 누가 하나라도 알맹이를 보여줬으면 발생하지 않았을것같은 일들. 오랜시간동안 자기 껍데기만을 강요하며 정작 자기들은 자기 알맹이를 바라보지 않는 모습. 내 주위에 수많은 껍데기들이 자기 말만 외치면서 서로 충돌하는 것을 지켜보는건 정말 구역질나는 일이다.


간만에 정신적 스트레스로 몸이 뻐근한 밤. 그나마 위로가 되는 화들짝 계단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